해보고 싶은 것들/미식가 흉내내기

Textbook Merlot, Napa Valley 2019

Almaymente 2022. 5. 26. 06:14

 마셔본 까베르네쇼비뇽 중에서 최고의 경험을 안겨준 텍스트북의 메를로 버젼. 평소라면 손이 나가기 힘들 가격대지만, 자주 가는 와인샵에서 최저가에 정말 조금 더한 가격대로 행사를 시작하였기에 큰맘먹고 샀다. 마침 와이프의 이직 성공이라는 좋은 소식을 축하하기 위해서라도 평소보다는 좋은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는 핑계를 더하니 부담은 눈 녹듯 사라졌다.

 

 텍스트북 메를로는 추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마도 까쇼버젼에서 느낄 수 있는 묵직함을 잊지 못해서 아닐까? 텍스트북 일지라도 메를로는 상당히 산뜻하게 넘어간다. 라이트한 바디감과 달콤한 맛이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영 추천받기 힘든 캐릭터라고 생각된다. 나도 처음에 마셔보고는 까쇼에서 겪었던 묵직한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놀랐다. 원래 메를로가 그런거지! 라고 되뇌이며 넘어가기에는 모처럼 와인에 큰 돈을 지출하기도 했고, 와이프를 축하하는 자리에 와인에서 모양이 빠지기엔 너무 아쉽다고 생각해서 심할 정도로 디켄팅을 해봤다.

 

 에어레이터까지 동원하여 평소보다 오랜시간 디켄팅을 하니, 맛은 좀 더 달달해진다.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바디감은 공기를 만나 희석된 느낌. 하지만 원래도 풍부했던 향이 한층 더 깊어져서 집 안이 꽃향기로 가득찬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와이프는 부담없이 딱 좋다는데, 내가 샀던 와인 중에서 상위권을 기록할 가격을 생각하면 와이프도 부담을 좀 느꼈으면 좋았을 법 싶었다.

 

 이 와인이 진가를 발휘하는 때는 디켄팅을 하고 나서 옅어진 캐릭터를 외롭지 않게 해줄 안주가 등장할 때다. 나는 술을 마실 때 안주 먹기를 싫어하는 편이라, 집에서 와인을 마실 때에는 안주 없이 한두잔 마시고 끝내는데, 와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새 옆에 앉아서 한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던 와이프가 치즈와 과일로 이뤄진 안주를 준비해주었다. 

 

 강력한 향기를 지닌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자체가 튀지 않아서 그런지 치즈와 과일을 곁들여 마시기 딱 좋았다. 장모님께서 주신 외국계 치즈와 딸기, 바나나 같은 과일들의 맛과 향도 한층 두텁게 느껴진다. '오.. 이런게 페어링이구나..' 라며 깨달음을 얻었는데, 와인의 맛도 두터워졌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라이트한 와인이 안주와 함께하니 숨어있던 스파이스가 슬쩍 느껴지며 재밌는 와인으로 변한다.

 

 메를로가 원래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걸까. 조금 더 알아봐야겠으니 메를로 와인을 한 병 더 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