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장소들/일본

일본 후쿠오카, 험한 동산 아부라야마

Almaymente 2025. 3. 18. 15:43


후쿠오카는 할게 많다. 식도락이나 쇼핑 면에서도 딱히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할게 없다. 후쿠오카에 오래 있다보면, 두어번 방문해봤다면, 할게 없다.

아무래도 미술관, 박물관이 크게 받쳐주질 못한다는 점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딱히 큰 규모가 아니고, 도처에 재즈바가 널린 도쿄와 비교하면 액티비티 자체도 깊이가 좀 아쉽다.

그래서 한두번 찾고 마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 같고, 나처럼 여러번 오는 사람들은 색다른 즐거움을 찾고자 몸부림을 치는 것 같다.

예전 구마모토에서 바다를 보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가 페리를 타고 나가사키까지 다녀왔던 모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기에 이번에도 바다로 갈까 하다가 문득 일본의 산이 궁금해졌다.

굽이굽이 돌아가자

 
후쿠오카에서 산을 가는 관광객은 아직 만나보질 못했다. 검색해보면 이미 경험한 사람이 나올지 모르겠으나,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무작정 산에 올라보기로 했다. 호텔이 위치한 하카타역에서 아부라야마 산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1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어차피 땀을 흘리려고 마음 먹은 상태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버스를 타고 가보기로 했다.
 

나홀로 등산객..

 
후쿠오카 시내에서는 차리차리(Charichari) 라는 자전거 대여 서비스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 서울의 따릉이처럼 도처에 스테이션이 있어 대여와 반납도 매우 간편하다. 외국인이 사용하기에도 결제 카드만 있다면야 어렵지도 않다. 다만 나처럼 후쿠오카 외곽의 산까지 가는 사람은 반납의 선택지가 제한되는데, 적당한 곳에서 반납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선택지가 있어 산 입구의 조용한 마을까지 오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산이 있으니 신사가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20분을 넘게 걸었다. 아침에 출발해서 등교하는 학생들과 동선이 겹쳤다. 걷다보니 하카타 공업 고등학교가 나온다. 표정 밝은 학생들과 엄숙하게 교문 앞을 지키는 선생님을 지나니 살짝 경사진 길을 오르게 된다. 정류장에서 내려 걸은지 30분이 되어갈 무렵, 굽이친 언덕길을 불안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마음 속을 채우는 후회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무렵, 산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신사가 나온다. 
 
이름은 정각사, 모시고 있는 관음은 油山관음이다. 갑자기 기름이 왜 나오나했는데, 아부라가 일본어로 기름이라는 뜻이다. 궁금해서 찾아봐도 기름과의 연관성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여튼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 말고는 혼자 오르던 길에 신사가 보이니 안심이다.
 

전망대

 
잘 다져져 있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전망대가 나온다. 아부라야마 카타에 전망대. 기름산의 편강 전망대라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찾아보니 이쪽 지역이 그냥 카타에 라는 지명이라고 한다. 얕게 아는 일본어가 문제다.
 
전망대는 연식이 느껴지지만, 대체로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 푸드트럭이나 노점은 없고 자판기가 있다. 사람 하나 없는 전망대에서는 Paypay 돔도 보이고, 맑은 날에는 먼 바다도 보일 것 같다. 한국에서 오니 후쿠오카 공기가 맑기 그지 없었는데, 일본에서는 대기질이 좋지 않은 편이라는 후쿠오카의 다른 면모도 보인다. 
 
 

왼쪽 둥그런 건물이 Paypay 돔

 
전망대에서보다 높은 곳에서 후쿠오카 시내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전망대 바로 건너편에 자그마한 등산로 입구가 보인다. 인적 없는 산이라 두려운 마음이 앞서지만, 후쿠오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설마 곰이나 나오겠나 싶어 무작정 올라본다. 등산화나 등산복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산이 높아보이지도 않았기에 만만하게 보고 시작했으나, 아뿔싸, 시작부터 산세가 험하다. 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코스가 이어진다. 
 
가빠지는 호흡에 시작부터 땀이 비오듯 흐른다. 하지만 여느 산이나 으레 그렇듯 시작이 힘들었으면 머지않아 평탄한 길이 나온다. 호흡을 고를 수 있는 평탄한 길을 만나 산 내음을 맡으며 걷다보니 후쿠오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다른 스팟이 나온다. 會當陵絶頂 一覽衆山小 (회당능절정 일람중산소). 정상에 올라 뭇 산들의 낮음을 굽어보겠다는 시구가 생각난다. 정작 정상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등산이라기보단 탐험

 
정상까지 얼마나 더 가야할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아침에 공복으로 시작한 등산이 허기를 불러온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등산로인지를 모르겠다. 산 속에서 길을 잃는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내려갈 때가 됐다는 뜻이다. 오르는 일 그 자체에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온갖 상념이 찾아오는 등산은 그 순간부터 하산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 내려가자.
 

한참을 내려와 올랐던 길로 다시

 
내려오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다. 올라왔던 길로 죽 내려갈거라면 모험의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방향과 높낮이만 보고 다른 길로 내려가길 선택했다. 우거진 숲을 한참 내려가도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 신호도 잘 잡히지 않는 곳에서 조급해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따라가니, 정각사가 다시 나온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반가울 따름.
 

평화가 함께하길..

 
등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 중에는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길로 가야 산이 맞는건지. 산은 보이는데 여기로 가는게 등산로가 나오는건지. 산에 들어가서도 이 길이 정상으로 가는 길이 맞는건지. 갈림길에서는 어디로 가야하는건지. 다른 길로 들어섰을 때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전파는 왜 터지지 않는거지.
 
이러거나 저러거나 결국 앞으로 한 발 내딛는게 정답이었고, 딛다보니 보이는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울창한 숲 속에서 소리도 질러보고, 멀리 보이는 후쿠오카 시내를 배경으로 말도 걸어보고.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등산객이라고는 나 혼자였는데, 오르는 중간중간 돌 무더기를 쌓아둔 곳이 있었다. 사람이 다녀가며 본인의 바람을 흔적으로 남긴 것이리라 생각하며, 무더기가 보일때마다 기도했다. 우리 가족 행복하고, 건강하고, 부자되게 해주세요. 순서가 오락가락할 때도 있었지만, 건강과 행복이 제일 앞에 있었다. 부자되는건 굳이 기도에 넣지 않을 때도 있었다.
 

멋진 풍경이었어

 
기도의 효과가 있었는지, 전파가 연결되고 나서 열어본 주식 계좌는 의도치 않은 수익이 발생해있었다. 내가 예상한 일정보다 빨리 찾아온 행운에 그대로 수익을 실현하고 남은 여행 기간동안 배부르게 지냈다. 기도하길 잘했다고 생각했고, 등산하러 온 선택도 참 괜찮았다고 자평했다. 여행 기간 중 즐거운 추억 한 페이지였다.